1. 생물학의 소개
생물의 기능·구조·발달·분포와 생명현상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 특히 모든 생물에 공통되는 생명현상의 본질 구명에 주안점을 둔 자연과학인데, 생물의 다양성에 바탕을 둔 각론을 포함한 광범한 분야를 가리킬 때도 있다.
2. 생물학의 연혁
인류는 먼 옛날부터 생물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식량, 의료(衣料), 주거와 도구의 재료가 되어온 생물은 인간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생물에 관한 개개의 지식은 먼 옛날부터 많이 집적되어왔다. 그러나 실용상의 목적을 떠나 지적 흥미의 대상으로서 생물에 관한 일반법칙이 정리되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로텔레스에 의한 바가 컸기 때문에 그를 생물학의 개조라 부르는 사람도 많다. 그 후 중세의 암흑시대를 거쳐 생물학은 서서히 체계가 잡혀갔지만 과학으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자연과학의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뒤였고, <생물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프랑스의 J. 라마르크 독일의 G.R. 트레비라누스에 의해 1802년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들은 동물과 식물에 공통된 <생명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구방법이나 사고의 측면에서 새로운 과학에 눈을 떠 이 용어를 사용했다. 초기에는 생물학을 형태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형태학>과, 그 기능에 눈을 돌린 (생리학)으로 크게 나누었으나, 오늘날에는 보다 미시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둘은 일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 생물학의 대상
생물학을 그 연구 대상에 따라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 등으로 크게 나누고, 다시 척추동물학·곤충학·어류학 등으로 세분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이와 같은 각론을 생물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한편 대상의 수준에 따라 나누기도 한다. 즉, 지구상에 서식하는 여러 생물의 상호관계와 환경과 생물과의 관계를 밝히고 생물군집의 시간적 천이 등을 알아 생물을 집단으로서 파악하는
환경생물학이나
생태학·
집단생물학·진화학과, 개개의 생물개체 또는 그 속의 기관(器官)이나 조직 수준에서의 연구 및 세포와 세포 수준에서 연구하는
세포생물학, 또 분자수준에서 생물을 파악하는 분자생물학 등이 있다. 이들은 생물에 대한 견해와 연구방법면에서 차이가 있다. 생물학을 주로 야외에서의 관찰이나 직관에 중점을 둔 자연사적 분야와 실험실 안에서의 분석적 분야로 나누기도 한다.
4. 근년의 역사
1) 생물학사의 3단계
생물현상에 관한 인식, 즉 넓은 뜻의 생물학의 발전 과정은 크게 나누어 3단계를 거쳐왔다. 제1단계는 현상론적 단계로서, 개별적인 생물현상에 관한 개별적이며 즉자적인 지식이 집적된 시대이다. 생물학사 전체에 대해서 본다면 박물학 시대에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한다면 과학 이전의 시대인데, 그 시대 말기 17∼19세기에는 다음 단계를 향한 비약으로서 생물학에서의 과학혁명의 요인이 많이 나타났다. 제2단계는 실체론적 단계로서, 복잡다양한 모든 생물현상을 법칙 형태로 일반화하여 파악하고 지식이 정리되는 단계이다. 따라서 화학적·수학적 분석방법이 발달하여 물리학·화학과의 접촉이 강화되던 시대이다. 과학혁명을 마치고 생물학이 비로소 현대과학의 양상을 띠고 급속히 발전하던 시대인데, 1870년대에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는 단계이다. 제1단계를 즉자적인 연구 시대라 한다면, 이 단계는 대자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제3단계는 본질적 단계이다. 생명의 본질이 과학적으로 즉자·대자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 단계이며, 현대가 이 단계로 이행하는 시대이다.
2) 생물학의 발단
인류의 생물에 관한 지식의 집적은 인류의 기원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생물의 수집과 수렵에 식생활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원시인류는 식물·동물의 종류, 발육 과정, 행동, 분포 등에 관한 본능적인 관심에서 차츰 그것들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고, 전승하기 시작했다. 식생활을 위한 조건의 충족이 의(衣)·주(住)에 대한 요구에 우선하는 절대적인 요건이었으므로 원시인의 지적 발달은 우선 생물에 관한 경험적 지식의 집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농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한 전제가 되었고, 농업에 대한 경험을 쌓음으로써 생물에 관한 지식이 증대했으리라고 생각된다.
3) 생명에 대한 착상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비교적 소규모의 집단생활을 영위하였다.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집단 내의 유대는 차츰 강화되고 그에 따라 침식을 같이하는 개인간의 정신적인 결속도 깊어졌다. 여기에서 영에 대한 감각이 생겼으며, 집단 결속의 상징으로서의 토템, 결속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의 의식(儀式)·주술 등이 생겨났다. 이것들은 또 생산력의 발달과는 대조적으로 두드러진 정체를 계속하고 있던 의술의 결여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생명에 대한 관념을 키웠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내적으로 체험하는 인간 생명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바랐으나 생명은 모든 생물 속에서 가장 고도의 구조를 가진 존재였으므로 그 이해를 희구하는 심각성에 반비례하여 이해하기 곤란함을 체험하는 결과가 되었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생산을 통한 생물에 관한 유물적인 이해와 인간 이해의 장벽을 통한 생명의 관념적인 이해가 때로는 서로 맞서면서 함께 진행되었다. 이 상태는 청동기시대·철기시대를 통한 고대와 중세에서도 기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었다.
4) 근대화를 향한 맥동
중세에 이르러 지배계급이 확립됨에 따라, 의학에 대한 계층의 기대는 점점 커졌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체의 구조를 알 필요가 있었으며,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금지되어 있던 인체해부가 엄한 제약 밑에서 실시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시도되었던 약용식물의 재배와 채집 및 약효처리 경험은 식물에 관한 지식을 축적했으나, 중세에는 귀족의 취미로서 식물 관찰이 활발해져 실용과는 관계없는 생물 지식도 수집하게 되어 박물학을 형성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들에 의한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의 지배는 진기한 식물·동물의 발견과 수집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박물학은 동물·식물에 관한 지식의 급속한 축적을 가져왔다. 이것은 근대 생물학의 토대를 쌓는 것이 되었다.
5) 과학혁명의 영향
17세기에 물리학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적 양상을 띤 과학이 성립되자, 이것은 생물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생물 현상을 경험적인 방법과 엄밀한 논리에 의해 실증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반복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W. 하비에 의한 혈액순환의 실험적 증명(1628)과 R. 훅에 의한
세포의 발견(1665)이다. 하비는 인체 내의 혈액의 흐름에 관해서 엄밀한 추론과 명쾌한 실험을 하였다. 즉, 그는 심장으로부터 일정 시간 내에 동맥으로 흘러 나가는 혈액의 양은 상상 이상으로 많기 때문에 혈액은 닫힌 공간 안을 순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정량적(定量的)인 논리가 사용되고, 이것이 G. 갈릴레이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태의 추론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그는 사람의 팔을 끈으로 묶어 동맥의 혈류는 정지시키지 않고 정맥의 혈류만 정지시켜 정맥 속의 혈류량의 변화를 관찰했다. 결과는 심장으로부터 팔을 묶은 곳까지의 정맥 속에는 혈액이 괴고 반대쪽 정맥 속에는 혈액이 거의 없어졌다. 이 결과를 보고 그는 혈액은 심장에서 나와 동맥으로 들어간 다음 동맥에서 정맥으로 들어가고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온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리하여 사람의 혈액순환설이 훌륭하게 증명되어 확립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업적이다. 다른 한편, 옥스퍼드대학의 기하학교수였던 훅은 코르크라는 물질이 탄성이 크고 가벼우며, 또 안정하다는 특성이 있다는 데 흥미를 느끼고, 그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그는 예로부터 반복되던 코르크의 존재 이유·의의 등에 관한 사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그 원인을 코르크 자체의 내부에서 찾았다. 이것은 경험이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만든 현미경으로 코르크의 얇은 조각을 관찰했다. 현미경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것은 인간의 감각을 도구에 의해 확장함으로써 보다 세밀한 관찰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하여 거기에서 세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코르크가 세포의 집단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코르크라는 물질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자신의 과학방법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아가서 목탄과 몇 종류의 살아 있는 식물에 대해서도 얇은 조각을 만들어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그것들의 세포를 발견하였다. 위의 두 사람 외에, 이 시기에는 M. 말피기에 의한
모세혈관(1661)과
적혈구(1668)의 발견, J. 스밤메르담의 곤충에 대한 세밀한 관찰(1658), A. 레벤후크의 미소생물(1675, 1680) 및 정자의 관찰(1677), R. 그라프의 이자 기능의 연구(1664), R. 보일의 호흡 연구(1660), G. 보렐리에 의한 운동의 역학적 연구(1680), T. 시드남에 의한 경험주의 의학의 연구, R.J. 카메라리우스에 의한 식물 생식기관의 연구(1694) 등 엄청난 수의 선구적인 연구가 속출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공통된 특징은 생물 현상을 경험적·실증적으로 해명하려는 자세였으며, 당시 물리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과학혁명의 영향을 볼 수가 있다.
6) 17세기 생물학의 한계
이러한 사실들은 마치생물학에 신시대가 도래한, 바꾸어 말하면 생물학에 혁명이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사실, 17세기에 생물학도 근대화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이고, 그 다음에 오는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보면 그것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해진다. 하비의 훌륭한 실험적 증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발견으로 생물의 다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이론은 전혀 도출된 것이 없었다. 하비의 방법론은 펌프작용에서 유추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생물 현상의 수수께끼를 푸는 보편적인 유효성은 없었다. 이 시대에 R. 데카르트는 하비의 실험을 높이 평가하고, 하비의 설을 신경계에 도입하여 신경작용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훅의 세포 발견도 생체의 기본구조로서의 세포의 역할이나 또 그것을 기반으로 한 생물 연구의 새로운 싹을 전개시킨 사실은 없었다. 생체의 현미경적 관찰은 그 후 활발하게 이루어져 18세기 말에는 의학에서 인체의 현미경적 구조에 대한 지식이 깊어졌으나 세포보다도 조직에 중점을 두었다. 실험적 연구자는 아니었으나 이 시대의 생물학의 선진성과 함께 전근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또하나의 예를 든다면 영국의 분류학자 J. 레이의 종(種)에 관한 견해가 있다. 그는 영국의 식물·동물에 관한 우수한 모노그래프를 쓰고 그 논문에서, 교배에 의해 양친을 많이 닮은 자손을 만들어내는 생물은 동일한 종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오늘날의 실험분류학의 기초라고도 할 수 있는 종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또한 종의 여러 특징이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수는 신이 창조한 이래 일정불변하다는 관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 점에 이 시대의 진보적인 생물학의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 한계는 반동적으로 18세기 전반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세기가 여행가·채집가·분류가의 위대한 세기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해외탐험의 성과가 새로운 지식이 되어 생물에 관한 식견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열대지방의 생물에 관한 식견은 생물의 분포·지리·지질과의 관계에 관한 고찰을 흥미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에서 C. 린네는 식물의 분류원리를 제시하여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분류학의 기초를 확립했다(1751). 그러나 그는 종은 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며 불변이라는 신앙을 버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모든 자연은 창조주의 영묘한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자연관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린네의 종은 기본적으로 <종류> 이상의 것은 될 수가 없었고, 이러한 사실들은 이 시대에도 생물학의 근대화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7) 생물화 근대화의 조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앞장서서 과학혁명을 끝내고 근대화를 이룩한 물리학과 화학의 영향을 받아, 생물현상의 연구에도 근대과학적인 특징의 일단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근대적인 생물학을 쌓아 올릴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그러한 기회는 19세기에 들어와서 간신히 무르익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생물학은 다음 5가지 조건을 정비함으로써 1870년대에 이르러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5가지 조건이란 세포설, 종개념, 진화론의 확립, 생물의 자연발생설의 부정 및 초자연적인 생명력의 부정이다. 세포설은 M.J. 슐라이덴이 착상하였고 《식물의 발생에 관하여(1838)》에 요약되었다. 그 주안점은 식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어서, 식물체가 발육·형성될 때에는 그 구성 세포의 수가 증가하고 형태가 변화한다는 관찰 사실에 바탕을 두고, 식물체의 구성 단위는 이제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조직이 아니라 세포라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동물체의 구조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T. 슈반의 공감을 얻었다. 슈반은 슐라이덴의 설을 동물에 적용하여 보다 면밀한 관찰 사실과 보다 치밀한 논술로 세포설이 식물·동물 양쪽에 모두 적용되는 일반원칙이라는 것을 역설했다(1839). 이 세포설은 즉시 받아들여졌지만 한 가지 큰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포가 증식하는 방식에 대한 독단적인 오해였다. 슐라이덴은 세포 안에는 반드시 핵이 있다는 사실을 중시했으며, 핵 속에는 핵소체(核小體)가 있고 핵소체 속에는 때로 점모양을 한 곳이 보이는 것에 근거를 두고 거꾸로 이 점모양 부분이 핵소체가 되고 핵소체가 핵이 되어 새로운 핵을 만든다고 하는 세포내 세포형성설을 제창했다. 이 잘못은 다른 연구자에 의해 즉시 발견되고 곧 핵분열·세포분열의 발견에 의해서 세포의 분열·증식이 일반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세포설은 확립되었다. 그러나 슈반은 세포의 분열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자신의 설을 주장하여 학계에서 멀어져 갔다. 핵분열의 의의는 유전물질을 딸세포에 균등하게 분배하는 데 있다는 것이 1800년대 후반에 밝혀졌으며, 이로써 세포설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은 생물분류의 기준단위인 이상, 종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분류학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서, 레이나 린네 외에 J.P. 투르느포르 등도 논한 바 있으나 모두 형식상의 논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종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종류의 한 카테고리에 지나지 않았다. 즉, 종이 어떤 내부구조를 가지고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서 변화·발전하느냐 하는 논의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생물의 진화에 대한 착상은 19세기 초부터 나타났으나(라마르크, 1809), 그 논의는 종의 변화의 동인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으므로 생물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 뒤 C.R.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난관을 타파했다. 다윈에 의해 종은 비로소 단순한 종류에 그치지 않고 진화라는 역사적 발전의 단위로 파악되었으며, 이렇게 재평가됨으로써 종은 내부구조를 가진 실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실체개념으로서의 종개념은 진화설의 성립과 함께 확립되었다. 이로써 모든 생물종은 그 존재의 역사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모든 종은 공통의 조상을 가지므로 외관상의 유연관계에는 실질적 기초가 있다는 것이 공인되었다. 17세기 이래 생물의 자연발생 가능성에 관한 실험적인 검토가 이루어져 왔으나, 몇 가지 곡절을 거쳐 1861년 L. 파스퇴르에 의해 실험적으로 완전히 부정되었다. 이 실험은 그때 이후 생물학의 여러 실험에 신뢰성을 주었으며, 생물에 관한 정량적인 관측을 가능하게 했다. 이 연구의 공적은 단순한 멸균의 의의와 그 방법의 개발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생물은 무기물과 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 복잡한 현상을 나타내므로, 일견 열역학의 법칙이나 몇 가지의 화학반응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일이 있으나, 결코 물리학·화학의 법칙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현대물리학의 절대 전제가 되어 있으나 이것은 특정연구의 성과, 또는 이론의 전개에 의해서 해명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 이후의 열역학의 발달과 유기화학의 발달에 따른 펩신의 발견(슈반, 1836), 혈액 속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존재(T.L.W. 비쇼프, 1837), 에너지 대사에서 글리코겐의 역할(C. 베르나르, 1855), 발효(파스퇴르, 1857, 1859), 단백질의 소화(C. 포이트, 1860), 광합성과 녹말의 관계(J. 작스, 1865) 등의 연구 성과, 특히 이들을 기초로 한 F. 호페자일러에 의한 생화학의 체계화 성공이 물리학·화학의 여러 법칙이 생체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확신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생물현상이 물리·화학 법칙의 규제 안에 있다는 인식은 생물학에 유물론적 기초를 부여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생물학에 과학의 한 분야로서의 자격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로써 예로부터 생물현상에 붙어 다니면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고 있던 생기론(生氣論) 등이 다시 생물학 속으로 끼어드는 여지를 완전히 배제하게 되었다.
8) 현대생물학의 전개
이상과 같은 5가지 전제가 대부분 잇따라 성립되자 그것에 따라 새로운 과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대 생물학을 성립·발전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이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물 현상이 모두 물리·화학 법칙의 규제를 받는다는 원칙이 용인된다고 하면, 발생·분화·유전·운동, 나아가서 감각에서 사고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하고 합목적적으로 보이는 생물활동은 모두 물리·화학법칙으로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흥미있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이 흥미는 20세기 생물학의 한 특징인 생화학을 급속하게 발전시킨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생물현상의 몇 가지 국면의 기초가 되어 있는 화학 현상을 발견하고, 그 물질적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또한 17세기에 일단 싹튼 다음 사라져 버린 메커니즘적 환원주의를 부활시켰다. 둘째, 세포설과 진화설 사이의 모순을 들 수 있다. 세포설은 슐라이덴·슈반에 의해 제창된 단계에서는 완전히 성립되지 못하고 세포분열(핵분열을 전제로 하고 있다)의 공인을 거쳐 가까스로 세포설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세포야말로 생명을 초세대적으로 유지·전승하는 실체라는 인식이 세포설 가운데 포함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인식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유성생식은 모두 단세포인 난자와 정자의 합체임이 밝혀진 것은 세포설의 위와 같은 함축된 의미를 강화한 셈이 된다. 이와 같은 인식은 세포의 불변성을 받아들인 것으로, 종의 한 구성원인 개체가 다음 세대의 개체를 동일한 종의 구성원으로 생성함으로써 종을 역사적으로 유지시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된다. 한편, 진화설은 종의 가변성을 증언한 것으로, 종의 변화는 당연히 종의 실체적 구성원인 개체의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며, 같은 논리에 따라 세포의 가변성도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세포설과 진화설과의 모순이다. 이 모순은 유전의 연구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유전학은 먼저 세포학과 결합했다. 그리고 염색체와 개체의 형질(종의 형질이기도 하다) 사이의 법칙적인 대응을 발견하여 세포유전학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서 염색체의 변이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변성을 갖는 세포 안에서의 종의 가변성의 근거를 파악하게 되었다. 염색체의 연구는 그 후 분자 수준까지 진행되어, 종의 안정성과 불안정성, 즉 진화의 물질적 근거를 밝히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개에 의한 진화의 연구는 보다 근본적인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핵분열의 메커니즘, 특히 감수분열의 메커니즘 문제였다. 전자에 대해서는 약간의 가설이 제창되어 실험적인 연구가 행해졌으나, 후자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문제가 방치된 이유는 그 난해성에도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유전학이 유성생식을 하지 않는(따라서 감수분열이 필요없는) 세균을 주된 재료로 하여 진보했으며, 생화학과 결부되어 유전생화학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유전생화학은 생물의 유전에서 정보전달 수단인 핵산을 발견하여 생물학의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장대한 발전으로 유전생화학의 시작을 생물학의 혁명적인 전환이며 근대화라 부르는 경향도 있으나 이것은 옳지 않다. 정보물질로서의 핵산의 기능이 예상 밖의 것이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생물학·화학이 공인하는 규범의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 이상 혁명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1870년대에 일어난 생물학 근대화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없이 원시적인 형태에 가까워지고, 마지막에는 무생물에서 생물이 탄생한다는 것을 시사하게 되는데, 파스퇴르의 실험은 생물의 자연발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가 되었으나, 이것은 A.I. 오파린에 의해 다윈과 파스퇴르의 입장을 모두 긍정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1936). 그리고 이 문제는 세포·개체·종의 형성 문제와 관련하여 세포·개체·종을 다른 각도에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은 생존경쟁설을 골자로 하였으나 이 생존경쟁설 자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다윈 자신도 충분히 옹호하지를 못했다. 이것은 앞으로의 큰 과제가 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의 하나로는, 근대화된 생물학이 실체론의 단계에서 생물현상의 메커니즘의 실재를 생득적인 전제로 한 환원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과 종의 구조요소인 개체 수준의 법칙 추구가 늦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뒤의 것은 이른바 개체군생태학(個體群生態學)이 오늘날 문제로 삼고 있는 점이다. 생태학은 처음에는 환경에 대한 개체 또는 개체군의 반응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범위에서는 집단 생리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동물의 행동학을 분기시키고, 또 개체수의 동태에 관한 연구를 개척함으로써 종수준의 법칙을 탐구하는 독립된 분야를 건설하게 되어, 현대 생물학을 생화학과 대조적으로 특징짓는 독특한 학문 영역이 되어 필연적으로 진화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